베이지색 머리의 소녀는 꿈을 꾸었다.
거대한 검은 기류가 아른거리며 저를 집어삼키려 들었다.
먹물이 번져나가듯 검은 기류의 주위마저 검게 물들고, 마침내 자신마저 그 어둠에 잠식되기 직전.
소녀는 꿈에서 깨어났다.
주황색의 구름을 밟으며 걸어다니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마코폭은 사뿐거리며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요람구름에 오기 전부터 들뜬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다른 마녀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능력, 누구라도 통과할 수 있는 마법능력시험에서 낙방하여 기록상 유아기에 머물러 있는 쓸모없는 마녀. 때문에 보호직에서 어린 마녀들을 돌보는 일밖에 할 수 없었던 마코폭에게 마침내 요람구름을 탐색하는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분홍빛 하늘은 그런 마코폭의 마음을 대변하듯 유난히 맑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리고 그런 하늘과 같이 아름다운 분홍빛의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
"안녕, 로시. 같이 임무를 하게 되어 반가워."
마코폭은 뮬로스에게 반갑게 인사를 걸었다. 뮬로스는 무표정하게 마코폭을 쳐다보았다.
"내 이름은 마코폭이야. 아까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편하게 마코라고 불러도 돼."
여전히 뮬로스는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마코폭은 입가에 걸린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마음이 들떴다.
잠깐의 정적 동안 바람이 그들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그것이 마코폭과 뮬로스의 첫 인사였다.
부드러운 구름에 그물이 널렸다. 훗날 마녀가 될, 응집한 구름 뭉치가 그물에 자연스럽게 걸릴 때까지 여유가 있었다. 마코폭은 그 시간을 틈타 뮬로스에게 다가갔다.
"저기, 로시."
뮬로스가 냉한 얼굴로 마코폭을 돌아보았다. 보통이라면 차가운 표정에 주눅들 만도 했지만, 마코폭은 용기를 내어 말을 이었다.
"나한테 마법을 가르쳐줄 수 있을까?"
곧장 뮬로스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뮬로스는 대답조차 하지 않고 쌩하니 마코폭을 지나쳤다. 당황한 마코폭이 뒤돌아 뮬로스를 쫓으려 했으나, 그녀는 이미 저만치 멀어져버린 후였다. 마침 짤랑, 하고 마코폭의 그물에 달린 방울추가 울렸다. 그래, 처음부터 잘될 수는 없지. 마코폭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아기 마녀를 건져올리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마코, 조리실엔 무슨 일이야?"
조리실에서 나오는 마코폭을 히사키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마코폭은 종이봉투들을 들어 보였다. 작은 봉투에서 달콤한 냄새가 풍겼다.
"과자를 만들려고. 선물할 사람이 있거든."
아, 네 것도 있어. 그렇게 덧붙이며 마코폭은 봉투 하나를 히사키에게 내밀었다. 히사키는 친구의 선물에 기뻐하면서도 궁금증이 일었다.
"누구한테 줄 건데?"
"그건… 아, 요람구름 임무 집합 시간이야! 이따가 다녀와서 얘기해 줄게."
과자봉투를 손에 든 채로 달려가는 마코폭을 바라보며 히사키는 생각에 잠겼다. 마코야 천성이 다정하고 친절하니 누구에게 선물을 주어도 이상할 건 없지만. 저렇게 직접 만든 과자를 줄 만한 상대가 따로 있던가?
의문이 풀린 것은 요람구름으로 임무를 나갔던 마녀들이 돌아온 뒤였다. 히사키는 터덜터덜 제게로 걸어오는 마코폭과 그녀의 손에 들린 과자봉투를 보고 물었다.
"선물할 거라고 하지 않았어?"
그러자 마코폭이 아쉬운 듯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얼굴로 히사키에게 답했다.
"응. 선물하려고 했는데… 마음에 안 들었나 봐. 어쩌면 단 음식을 싫어하는지도 모르고…."
마코폭이 과자를 선물하려 한 상대는 요람구름에 함께 임무를 나가는 짝이라고 했다. 친해지고도 싶고, 마법을 배우고 싶기도 해서 선물을 준비했었다는 말에 히사키는 응원의 의미로 마코폭의 등을 두드렸다. 마코폭은 그에 배시시 웃어 보였다. 히사키는 친구의 미소를 바라보다, 문득 생각난 듯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마법을 배워서 뭘 할 거야?"
"마법을 배우면 이것저것 다 해보고 싶지만… 무엇보다 다친 사람들을 치료해주고 싶어."
마코폭다운 말에 히사키도 씩 웃었다.
"멋지다. 나는 강한 마법으로 마수들을 무찌르고 싶어. 언젠가 나도 최전선에서 싸울 날이 오게 될까?"
히사키가 몇 차례 전투조에 지원했다가 번번이 떨어진 것을 알고 있는 마코폭은 히사키의 손에 제 손을 얹었다. 그리고 히사키에게, 자신에게 용기를 불어넣듯 확신 어린 어조로 말했다.
"응. 분명히."
"고마워. 마코 너도, 마법을 배워서 꼭 멋진 마녀가 될 수 있을 거야."
두 소녀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직접 만든 과자를 가져다주려고 한 이후에도 마코폭의 호의는 끊이지 않았다. 언제나 말을 걸고, 다정하게 다가오며 사소한 인사와 걱정까지. 처음에는 귀찮게만 여겼지만 그런 일들이 반복되자 어느새 뮬로스는 자신의 거리에 마코폭이 있는 걸 익숙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왠지, 없어지면 허전할 것처럼….
뮬로스는 자신을 바라보는 순진무구한 얼굴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마코폭이 처음 마법을 가르쳐달라 말을 걸었을 때는 그녀 역시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제 이익을 위해 저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시하고, 부러 차갑게 굴었는데. 마코폭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제게 말을 걸고, 또 다가오는 것이 단지 마법을 배우기 위해서라고 보기엔.
"로시, 오늘따라 표정이 안 좋은데. 무슨 일 있어?"
뮬로스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걱정 어린 얼굴에 담긴 마음은 진심이라고. 마코폭은 처음 보았을 때부터 참으로 한결같았다. 제게 건네는 말들이 지나치게 다정했다.
마코폭을 밀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껏 그녀를 거절해 왔다가 이제 와서 살갑게 말을 붙이는 것도 우스운 일이라, 뮬로스는 미묘한 얼굴로 "아니, 별로."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러면서 마코폭을 곁눈질로 슬쩍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다행이야."
마코폭은 웃고 있었다.
뮬로스는 내부에서, 가슴 왼쪽 부근에서부터 무언가가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추위에 질린 몸속에 온수가 흐르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처음 겪어보는 그것은 온몸을 순환하며 어떤 감정을 주입했다. 뮬로스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묘한 기대감이 생겼다. 어떤 것을 바라는지도 모른 채.
마코폭은 요즈음 퍽 기분이 좋았다. 저를 귀찮아하는 듯하던 뮬로스가, 짧을지언정 제게 대답도 해주고 마코폭이 그물을 건져올리는 것을 어려워하고 있으면 모르는 척 말없이 와서 도와주곤 했던 것이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자, 마코폭은 뮬로스와 한 발짝 친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전처럼 말을 걸기가 어렵지도 않고, 저를 보는 표정도 많이 누그러지고…. 하지만 마법을 가르쳐달라고 하면 내게 실망하겠지. 마코폭은 겨우 친해진 친구를 제 욕심 때문에 잃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도 괜한 말을 해서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뮬로스에게 물어보는 것 말고도 마법을 배울 방법은 있을 거야. 어쩌면 히카사에게 부탁해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올 수도 있고….
"마코, 뭐 하는 거야."
"어, 어?"
마코는 깜짝 놀라서 옆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뮬로스가 마코폭의 곁에 다가와 있었다. 마코폭이 당황해서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니, 그물 안에 흠뻑 들어차 있는 구름덩이가 눈에 띄었다. 생각에 깊이 잠겨서 방울추가 울리는 것을 미처 듣지 못했다.
뮬로스가 한숨을 쉬며 그물에서 손을 띄운 채 마력을 불어넣었다. 가에서부터 중심으로, 뮬로스의 손이 움직이는 대로 마력이 감응하여 그물이 순식간에 웅크러들었다. 팟, 한쪽 손을 위로 올리자 응집된 구름을 감싼 그물이 튀어올랐다. 마코폭은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멋지다.
그런 생각을 할 즈음에, 뮬로스가 "마코. 손 줘 봐." 하며 자신을 불렀다. 마코폭은 곧장 손을 내밀었다. 아기 마녀를 담은 그물을 넘겨주리란 생각과 다르게, 뮬로스는 마코폭의 손을 잡더니 어떤 기운을 흘려보냈다.
"어어?"
뮬로스로부터 마코폭에게로, 소량의 마력이 흐름을 타고 옮겨갔다. 마코폭은 손끝에서부터 느껴지는 청량하고도 따뜻한 기운에 연신 뮬로스와 제 손을 번갈아 보았다.
"마법, 배우고 싶다고 했잖아. 마력을 조금 빌려줄 테니 연습해 봐."
마코폭의 눈이 크게 커지며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뮬로스의 눈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순수하게 기뻐하는 마코폭의 모습에 희미한 뿌듯함이 차올랐다. 뮬로스는 큼, 하고 헛기침한 뒤 말을 이었다.
"저쪽 그물도 다 된 것 같으니까, 한번 내가 했던 대로 해봐."
응! 밝게 대답한 마코폭이 신난 발걸음으로 펼쳐 놓은 그물을 향해 다가갔다. 한껏 기대를 머금고 뮬로스가 했듯이 그물 조금 위에서 마력을 불어넣고 손을 움직이자, 그물이 마코폭의 손을 따라 서서히 움직이는 듯하더니 이내 원래대로 스러졌다. 몇 번 시도해 봤지만 결과는 같았다.
"역시 생각만큼 잘되진 않네."
마코폭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뮬로스는 그런 마코폭을 무시하지도 놀리지도 않고 덤덤한 표정을 유지했다.
"될 때까지 연습하면 되지."
"응, 열심히 할게."
마코폭은 더 연습해보고 싶었으나 슬슬 정리하고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마법 없이 손으로 그물을 잡아 갈무리했다. 마법을 쓰는 덴 실패했지만, 아기 마녀를 품에 안은 채 차원을 이동하기 위해 채비하는 마코폭은 평소보다 들떠 있었다. 얼른 가서 이 소식을 히사키에게도 말해주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며 포탈에 발을 들여놓기 직전, 마코폭은 밝은 얼굴로 뮬로스에게 말했다.
"로시, 고마워."
"손가락 끝으로, 마력을 방출해서 잡아둔다고 생각하면 돼. 촛불처럼. 자, 이렇게."
뮬로스의 손끝에서부터 환한 빛이 피어올랐다. 어둡던 시야가 한순간에 밝게 물든 탓에 마코폭은 반사적으로 눈을 살짝 찡그렸다. 눈을 몇 번 깜빡거리자 이윽고 그녀의 얼굴에 비눗방울을 처음 보는 아이와 같은 표정이 서렸다.
마코폭은 제 손을 쳐다보며 뮬로스의 말대로 천천히 빛을 일으키는 데 힘썼다. 반딧불이 같은 불빛이 몇 번 깜빡이다 꺼졌다.
"……."
다시 손가락 끝으로 마법을 흘려보내 봤으나, 불빛이 아까보다 좀 더 커졌을 뿐 역시나 금방 꺼져버렸다. 마코폭의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이, 이런 건 처음이라."
마코폭이 부끄러워하며 변명하듯 말하자 뮬로스가 덤덤하게 답했다.
"계속해 봐."
또 실패하진 않을까. 나는 정말 쓸모없는 마녀일까. 그런 불안감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자신을 지켜봐 주는 뮬로스가 곁에 있기에 마코폭은 용기를 냈다. 처음에 뮬로스에게 말을 걸었을 때처럼.
마코폭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집중해서 마력을 움직였다. 손가락 끝으로, 마력을 방출해서 잡아두듯이….
"앗!"
반짝, 한순간 손끝이 빛났다. 빛을 바라보는 둘의 얼굴에 뚜렷한 그림자가 생겼다. 그러다 세기가 약해졌지만, 마코폭의 마법은 미약하게나마 빛을 잃지 않고 은은하게 빛났다.
"성공했네."
뮬로스가 마코폭을 보며 칭찬하듯 말했다.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던 마코폭은 민망한 듯 웃으며 응, 하고 답했다. 뮬로스의 입가가 완만한 호선을 그렸다. 아직 약한 불빛을 피워내는 제 손가락을 보며 마코폭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품고 입꼬리를 당겼다.
정말로, 성공한 것이다.
"계속 그렇게 하면 돼. 다른 마법도."
실패해도, 내가 옆에서 지켜봐 줄 테니까.
뮬로스의 말에 마코폭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응!"
씩씩하게 대답하는 마코폭의 얼굴이 희미하게 빛났다.
"흐르는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집중해 봐. 눈을 감고 느껴 보는 것도 좋겠지."
"마력을 한 번에 다 흘려보내는 게 아니라, 조금씩 끊어서. 이렇게."
"도서관에 있던 책인데 이것도 읽어보면 도움이 될 거야."
뮬로스와의 마법 수업은 ―몇 번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어쨌든 전체적으론―순조로웠다. 여러 번 실패해서 낙심하기도 하고, 마코폭이 뮬로스를 소개해 주자 유능하고 차가운 뮬로스의 평판을 알았던 히사키가 놀라기도 하고……. 그래도 분명히 즐거웠다.
"로시, 들어갈게―."
여느 때처럼 뮬로스의 방문을 두드리고 문을 연 마코폭은 예상치 못한 광경에 깜짝 놀랐다. 뮬로스의 다리에 못 보던 붕대와 반창고가 여기저기 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냥 봐도 일반적인 상처의 크기가 아니었다.
"마코. 왔어?"
뮬로스는 평소와 다름없이 마코폭을 맞았다. 오히려 그에 불안해하는 것은 마코폭이었다.
"로시, 다리의 그 상처는 뭐야? 어쩌다가 이렇게 크게 다쳤어…. 괜찮아?"
"별거 아니야. 마수를 상대하다 보면 가끔 이래. 신경 쓰지 마."
뮬로스는 태연하게 답했다. 마코폭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뮬로스의 다리를 힐끔거렸다. 안 그래도 전날 마법을 연습하느라 제대로 자지 못해서 피곤한데, 걱정까지 더해지니 수업에도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마코. 괜찮아?"
마코폭이 연달아 마력의 흐름을 놓치자 뮬로스가 물었다. 집중하지 못하는 마코폭의 모습을 보고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서 끝내는 좋겠다는 판단을 내린 뮬로스는, 자리를 정리하고 복도로 나왔다. 뮬로스가 손짓하여 커다란 창문을 열었다. 청록색에서부터 물을 탄 듯한 푸른빛이 부드럽게 이어지는 하늘과 살랑이며 불어오는 바람결에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마코폭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마코, 오늘은 이만 쉬는 게 좋겠어. 얼굴도 피곤해 보이고."
"아, 이건 잠을 못 자서… 헤헤."
마코폭이 웃으며 손으로 눈을 비볐다.
"지금이라도 들어가서 자."
"…그럼 오늘은 먼저 들어가 볼게. 로시, 다리 다 나을 때까지 무리하면 안 돼. 싸울 때도 조심하고!"
진심어린 걱정의 말을 건네니 그나마 마음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뮬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뮬로스는 멀어져가는 마코폭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창을 닫았다. 시간이 난 김에 산책이라도 할까. 그렇게 생각하며 계단을 내려온 뮬로스에게 어디선가 본 듯한 노란빛 귀가 눈에 띄었다.
"너는… 히사키?"
"어라, 로시?"
마코폭의 친구 둘의 눈이 마주쳤다. 일전에 마코폭의 소개로 마주한 적이 있지만, 단둘이 만나는 것은 처음이다. 히사키가 가볍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안녕. 마코랑 마법 수업하고 오는 길이야?"
"응."
"그렇구나. 나는 바람 좀 쐬려고 나왔어."
뮬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근처 벤치에 걸터앉았다. 히사키가 뮬로스의 옆에 따라 앉았다.
"그때도 말했지만… 설마 마코의 선생님이 로시일 줄은 몰랐어. 마법 수업은 잘돼 가?"
히사키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뮬로스는 히사키를 쳐다보며 적당히 대답했다.
"그럭저럭."
"아무튼, 그렇게 원하던 마법을 배울 수 있게 되다니 마코는 좋겠네. 마법을 배워서 하고 싶은 게 많아 보였거든. 치료도 그렇고."
"치료?"
뮬로스는 반창고가 붙은 제 다리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마코폭이 왜 마법을 배우고자 하는지는 물어본 적이 없었다.
"응. 마법을 배우면 무엇보다도 다친 사람들을 치료해 주고 싶다고 그랬어. 난 강한 마법으로 마수들과 싸우고 싶다고 했고… 하하."
일전의 대화를 떠올리며 히사키가 웃었다. 뮬로스가 그런 히사키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마수들과 싸우고 싶어?"
"응? 아, 응. …멋있게 마수를 물리치는 모습이 멋있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꼭 그것 때문은 아니야. 전투직 애들이 전투에 나서는 걸 보면… 뭔가, 보호받기만 하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무력하다는 게 느껴져. 저 애들은 저렇게 최전선에서, 마수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싸우고 있는데…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같아서. …그래서, 나도 싸우고 싶어."
히사키가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너무 주절주절 말했나 싶어 살짝 민망해지기도 했다. 이야기를 듣는 뮬로스의 얼굴은 비웃는 기색 없이 진지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 아니야. 다른 직업들도 필요해서 맡은 바가 있으니까. 아무튼 넌 아직 전투직이 아닌 거구나."
히사카가 흰 날개를 작게 팔락였다.
"응, 희귀하다는 날개를 가지고 태어나긴 했지만 비행이 좀 불안정해서. 전투직에 몇 번씩 지원은 해 봤는데… 매번 떨어졌어."
뮬로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전투직은 멋있기만 한 직업이 아니야. 항상 위험에 뛰어들어야 하고, 잘못하면 크게 다치는 것은 물론 심하면 죽을 수도 있어. 그래도 싸우고 싶어?"
"응. 각오는 진작에 돼 있어."
"……."
그렇게 말하는 히사키의 눈은 곧고 굳었다.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를 바라보다 뮬로스는 짤막하게 말했다.
"알겠어."
그러고선 뮬로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하늘은 해가 저물어 주황빛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발밑에서 그림자가 길게 기울어졌다.
"오늘 얘기 즐거웠어. 아, 비행 연습은 꾸준히 해야 할 거야."
"응? 으응. 나도 재밌었어. 잘 들어가!"
히사키가 손을 흔들며 뮬로스를 배웅했다. 소문으로 들은 것만큼 냉정하기만 한 애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이 찬다. 달리면서 뒤를 돌아보자 어둠은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대로 저를 집어삼킬 것만 같다. 달아나고, 또 달아나도 어둠은 빈틈없이 저를 쫓는다. 저것에 닿으면 어떻게 될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닿는 순간, 순식간에 저마저 어둠으로 물들어서, 그대로…….
"허억!"
짧은 탄식을 내뱉으며 마코폭은 잠에서 깨어났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마코폭은 주위를 둘러봤지만, 구체 형태의 어둠은 온데간데없고 익숙한 제 방의 광경이 보일 뿐이었다.
"꿈이었구나……."
어느새 가빠져 있던 호흡이 점점 안정되기 시작했다. 정말 끔찍한 꿈이었어. 마코폭은 고개를 흔들어 꿈의 심상을 털어버리려고 애쓰며, 이불 밖으로 나왔다. 몸이 찌뿌둥해 기지개를 켜며 작은 창을 바라보니, 오늘따라 날이 흐렸다.
"비가 오려나?"
마코폭은 혼잣말하며 갈아입을 옷을 챙겨 공용 욕실로 향했다.
보육원 뒤편의 작은 화단에 물을 주던 마코폭을 향해 한껏 부풀어오른 표정의 히사키가 다가왔다. 흐린 날씨와 대비되게 히사키는 유난히 밝아 보였다.
"히사키, 무슨 좋은 일 있어?"
"응, 나 전투직에 지원했어! 이번엔 정말 잘될지도 몰라."
"전투직에?"
순간 붕대와 반창고를 잔뜩 붙인 뮬로스의 다리가 머릿속을 스쳤다. 마코폭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응. 나 요전에 우연히 로시를 만났거든. 그래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주제가 그쪽으로 흘렀는데… 내가 전투직에서 마수들과 싸우고 싶다고 했더니, 그때 말한 것 때문에 내게 도움을 주려나 봐. 전투직 조장이 나한테 전투직에 지원할 거냐고 찾아왔어. 로시가 내 얘기를 한 모양이야. 물론 당장 싸우는 건 무리고 비행도 더 연습해야겠지만, 이대로 가면 나도 전투직에서 싸울 수 있을 것 같아. 굉장하지?"
히사키가 신나게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것을 듣던 마코폭은 살짝 안절부절못한 기색을 보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히사키……. 전투직에 지원하는 거, 다시 생각해보면 안 될까?"
"응? 왜? 내가 항상 전투직에 가고 싶어 했던 거 알잖아."
"으응. 그렇지만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 물론 네가 마수들과 싸우고 싶다고 한 건 알고 있지만, 아무래도 걱정이 돼. 마수들과 싸우다가 다치면 어떡하지, 혹시라도 기억을 잃으면 어떡하지…… 그런 불안감이 든단 말이야."
히사키는 저를 걱정하는 친구의 마음이 기꺼웠는지 빙그레 웃고 안심시키기 위해 말했다.
"괜찮아, 어차피 각오한 일이고 아직 본격적으로 싸움에 나가는 건 아니니까. 충분히 훈련하고, 다치지 않게 조심해서 싸울게."
"그래도……. 히사키, 나 정말 걱정돼. 지금이라도 그만두면 안 될까? 부탁이야."
그러자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히사키의 표정도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마코, 왜 그래? 난 이제야 길이 보여서 기뻐하고 있는데……. 전에는 그런 말 없었잖아."
"물론 네가 꿈을 이루는 것이 배아파서 그런 건 아니야. 그치만 그냥, 불안해. 히사키, 응?"
마코폭의 계속된 만류에 히사키의 입매가 굳었다.
"마코, 너 오늘 이상해. 내가 전투직에 지원했다고 하면 너도 같이 응원해줄 줄 알았는데……."
"히사키……."
마코폭은 작게 히사키의 이름을 부를 뿐, 제 의견을 철회하지 않았다. 설득해도 소용없을 것 같은 모습에 히사키는 어쩐지 울컥하여 충동적으로 마코폭에게서 뒤를 돌았다.
"마코, 네가 반대해도 난 전투직에 지원할 거야. 걱정되는 건 알겠지만 그건 마수들과 싸우려면 당연히 감수해야 할 일이야. 네가 이렇게까지 날 못 믿을 줄 몰랐어…. 이만 가볼게."
히사키도 이 일로 마코폭과 논쟁을 벌이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걸음을 빨리하여 보육원을 벗어났다. 흐린 하늘에서 빗방울이 툭, 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코폭은 여전히 불안을 씻을 수 없었다.
"로시, 할 말이 있어."
드물게 굳은 표정의 마코폭이 다가오자 뮬로스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뮬로스는 읽고 있던 책을 덮고 말했다.
"뭔데?"
"로시가 히사키가 전투직에 지원하는 데 도움을 주겠단 얘길 들었어. 그거, 지금이라도 그만둬줄 순 없을까?"
"갑자기? 왜?"
"나… 히사키가 걱정돼. 전투직에서 싸우게 되면 분명 심하게 다칠 일도 있을 것 같아서……. 그럼 어떡하지, 하고 자꾸 불안해."
뮬로스의 표정이 굳었다.
"그렇지만 히사키는 모두 각오하고 전투직에 지원하겠다고 했어."
"하지만……."
"마코, 네가 히사키가 전투직에 지원하는 것에 참견할 자격은 없어. 히사키가 다칠까 봐 걱정된다고 했지? 다른 전투직 마녀들도 마찬가지야. 모두 그런 위험을 각오하고 싸운다고. 히사키가 다치지 않으면 다른 마녀가 대신 다칠 뿐이야. 이기적이잖아. 전투직 마녀들은 마수로부터 너희를 보호하기 위해 큰 부상을, 심하면 죽음도 감수하고 싸우는데 너만의 욕심으로 히사키를 방해하려 하지 마."
뮬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마코폭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
"로시……."
"네가 히사키가 다치지 않게 지킬 수 있어? 없잖아. 그럴 힘도 없으면서 괜히 챙기려 하지 마. 네 친구는 스스로를 지키고 있으니 발목 잡지 마."
처음 듣는 뮬로스의 싸늘한 말투에 마코폭의 기가 죽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처럼 마코폭에게 박혀왔다.
…가슴이 아팠다. 뮬로스의 말대로 자신은 친구들을 지킬 힘이 없다. 무능한 자신에 대한 원망이 피어올랐다.
마코폭이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아무 말 못 하고 있자, 뮬로스는 책을 품에 끼고 마코폭을 지나쳐갔다. 마코폭은 차마 그녀를 돌아보지 못했다. 눈앞이 일렁거렸다.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차올라와 목이 메었다. 코끝이 시큰해졌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걸까.
마코폭은 그 이후로 마법 수업을 들으러 오지 않았다. 심한 말을 하고 그렇게 자리를 떴으니, 먼저 찾아오기 힘들 거란 걸 알면서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코폭이라면 그래도 다시 다가올 줄 알았다.
처음 사귄 친구에게 모진 말을 내뱉은 뮬로스의 마음도 좋지 않았다. 심하게 풀죽은 마코폭의 모습이 자꾸 걸렸다. 그런 뮬로스가 가진 감정은 후회였다.
히사키의 일을 마코폭이 제 욕심으로 방해할 순 없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렇지만 조금 더 살살 말해도 되지 않았을까. 그렇게까지 쏘아붙일 필요는 없었는데.
마코라면 제 의견에 반대하더라도 이렇게 다그치지 않았을 텐데…….
뮬로스의 상념을 끊은 것은 노크 소리였다.
"로시, 안에 있어?"
"어, 들어와."
히사키의 목소리였다. 로시가 허락하자 히사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날 불렀다고 들어서. 무슨 일이야?"
뮬로스가 히사키에게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추천서야. 아무래도 전투직에서 떨어진 전적이 몇 번 있으니까 그냥 붙긴 힘들 것 같아서 준비했어. 이게 있으면 더 나을 거야. 그리고 전투직에 가게 되면 유용할 조언 몇 가지도 알려줄게."
히사키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것을 보는 뮬로스는 가슴 한쪽이 무거워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히사키의 얼굴에 축 처진 마코폭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로시, 정말 고마워."
"…별거 아니야."
뮬로스는 고개를 저으며 마코폭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려 애썼다.
환한 달이 복도를 걸어가는 뮬로스의 모습을 비췄다. 뮬로스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요즈음 마음이 심란한 탓에 오늘은 평소에 하지 않던 실수까지 저지를 뻔했다. 아무래도 휴식이 필요한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뮬로스는 방에 가면 바로 옷을 갈아입고 숙면을 취하고자 했다.
"로시…."
그러나 뮬로스의 방 앞에는 손님이 있었다. 마코폭이 방문에 기댄 채로 뮬로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품에는 커다란 책을 안고, 한 손으로는 베이지색 머리카락을 한 줄기 잡아 꼬던 채였다. 뮬로스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마코."
"나, 히사키를 만나고 왔어. 당분간은 후방에 서겠지만 어쨌든 전투직에 붙었다고 하더라. 그래서…… 축하해주고 오는 길이야."
"……."
"물론 여전히 히사키가 걱정되긴 해. 잘못해서 크게 다칠까 봐…. 그렇지만 네 말이 맞아. 내 걱정으로 히사키의 꿈을 방해한다면 그건 이기적인 일이겠지. 내가 마법을 배우고 싶었듯이, 마수들을 물리치는 건 히사키의 소망이었으니까. 그래서 응원하려고 해."
뮬로스는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준 마법책을 들고 찾아온 걸 보면 수업을 계속하려 하는 거겠지. 몸에 피로가 쌓였지만, 뮬로스는 바로 잠들려던 계획을 미루고 머릿속으로 수업에 걸릴 시간을 헤아려 보았다. 오래는 안 되겠지만 잠깐이라면 봐줄 수 있을 것이다. 뮬로스가 마코폭에게 들어가자고 말하려 할 때였다.
마코폭이 뮬로스에게 책을 내밀었다.
"로시, 이제 내게 마법을 가르쳐주지 않아도 돼."
그 말에 뮬로스가 멈칫했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네 말대로 난 누군가를 지킬 힘도 없으면서, 내 욕심으로 로시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고 힘들게 했어. 히사카도 마수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열심히 싸우려고 하는데, 나는 나 좋을 대로… 나 편할 대로 네 시간을 뺏고 다른 마녀들처럼 쉽게 마법을 구사할 수도 없으면서 계속 네게 가르쳐달라고 했어. 나도 다른 마녀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나한테는 과분한 일이었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할게. 미안해. 그동안 고마웠어."
그렇게 말하는 마코폭은 쓸쓸하게 웃고 있었다. 뮬로스의 호박빛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애초에 네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건 내 선택이었어. 그러니 미안해하지 마. 마법이 안 늘면 계속 연습하면 돼. 마법, 배우고 싶어 했잖아…….
속에서 수많은 말이 요동쳤다. 그러나 뮬로스의 입은 잠깐 떨어졌다가 말을 내뱉기를 머뭇거리고, 다시 다물릴 뿐이었다. 마코폭은 그런 뮬로스를 지켜보다 뮬로스의 품에 책을 안겼다.
나는 그저 네가 마법을 배우면서 기뻐하길 바랐는데. 네가 나한테 기댔으면 했는데.
"늦은 시각에 이렇게 붙잡아서 미안해. 그럼 난 가볼게."
마코폭이 뛰듯이 뮬로스를 지나치려는 순간, 뮬로스는 저도 모르게 마코폭의 손목을 붙잡았다. 마코폭이 망설이다 멈춰섰다.
"로시?"
"……."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러나 물기가 차오른 회색안을 마주하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마코폭에게 날카롭게 일갈하고 헤어졌던 것이 생각났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사과해야, 하는데…….
"…할 말 없으면 이만 갈게."
마코폭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뮬로스에게 잡힌 손목을 조심스럽게 빼내려 했다. 그 순간 뮬로스는 충동적으로 마코폭에게 돌려받은 책을 도로 넘겼다. 그러고 재빨리 방 안으로 들어간 뒤 문을 쾅 닫았다.
가시돋친 말을 내뱉는 것은 쉬웠는데, 사과 한 마디 하는 것은 왜 이토록 입이 떨어지지 않는 걸까.
죄책감과 자괴감이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뮬로스는 양손으로 지친 낯을 쓸었다.
히사키의 첫 실전 날이 다가왔다. 히사키는 뮬로스와 2인 1조를 이뤄, 뮬로스를 보조하며 대략적인 전투를 익히도록 배치되었다. 뮬로스가 히사키를 힐끗 바라봤다.
나, 히사키가 걱정돼….
마코폭의 말이 머릿속에서 어른거렸다. 그날 마코폭이 내보인 불안감은 진심이었다. 뮬로스는 마력의 흐름을 체크하며 상념을 떨쳐냈다. 전투가 처음인 히사키를 위해 위험하지 않은 곳으로 배정되었으니 괜찮을 것이다. 뮬로스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긴장한 히사키를 향해 전투 시작 신호를 보냈다.
약한 마수만 모인 곳답게 큰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전투에 익숙하지 않은 히사키가 고전할 때가 있었지만, 뮬로스는 그런 히사키를 둘러싼 마수들을 쳐내며 히사키를 보호했다. 마수 중 대부분이 뮬로스에 의해 쓰러졌다. 남은 마수는 세 마리. 뮬로스는 금방 끝내고 돌아갈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공격 자세를 취했다. 그때 불현듯 불길한 감각이 뮬로스를 스치고 지나갔다.
"…?"
마수 세 마리가 도망치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저들끼리 합세해 몸집을 키웠다. 검은색의 몸체가 우드득 부풀어올랐다. 합체한 마수는 위험한 기류를 풍겼다. 뮬로스는 귀찮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작게 혀를 찼다.
그래도 저 정도 크기면 충분히 이길 수 있어.
그렇게 생각하며 뮬로스가 마수에게 달려들었다. 팟, 마력이 응축된 구체가 마수를 향해 날아들었다. 마수의 옆구리에 일순 구멍이 뚫린 듯하다가도 금세 수복되었다. 마수는 쐐액 가지를 뻗어 뮬로스를 공격했다.
칫, 뮬로스가 혀를 차며 왼쪽 날개를 펼쳐 낙하했다. 마수의 가지가 뮬로스가 있던 자리를 스쳤다. 뮬로스는 아래에서 마수를 향해 마력을 쏘아보냈다. 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뮬로스가 마수를 살피니 꾸물대며 구멍 난 곳의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고 있었다.
"히사키, 마수의 뒤로 가서 계속 공격해!"
아무래도 마수가 회복하기 전 물량으로 쏟아붓지 않으면 처리가 요원할 듯했다. 히사키는 고개를 끄덕이고 뮬로스와 마수를 빙 에둘러 마수의 뒤로 향했다. 그때 뮬로스만을 견제하던 마수가 가지를 뒤로 뻗더니 히사카에게 돌진했다.
"…!"
히사키는 저도 모르게 몸을 틀었지만, 마수의 가지가 히사카의 날개를 지나친 탓에 비행에 차질이 생겼다. 히사카는 열심히 날개를 펄럭거렸지만 간신히 떠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공중에서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순식간에 마수에게서 돋아난 서너 개의 가지가 히사카를 덮쳐 왔다.
"――!!"
히사키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러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히사키가 슬쩍 눈을 뜨니, 뮬로스가 제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채도 낮은 분홍색 양갈래가 흔들렸다.
"로시!"
"물러서 있어!"
히사키가 뮬로스를 향해 다가가려 했지만, 뮬로스는 크게 외쳐 그녀를 제지했다. 뮬로스는 어깨에서 번져나오는 통증을 참고 마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수가 수 개의 가지를 뻗더니 뮬로스를 공격해왔다. 뮬로스는 손끝에서부터 날카로운 직선 형태의 마력을 방출하여 그대로 휘둘렀다. 마수의 가지가 싹뚝 잘려나갔다. 뮬로스는 다시 마수를 향해 구체의 마력을 쏘아냈다. 마력이 마수의 몸통을 뚫고 지나갔으나, 뚫린 구멍이 스멀스멀 다시 차올랐다.
뮬로스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마수의 몸통 한가운데를 향해 내달았다. 양손을 맞잡고 마력을 끌어와 그대로 마수의 몸통으로 사출했다. 제법 커다란 구멍이 생겨났다. 뮬로스는 마수가 회복할 틈을 주지 않고 달려들어 뚫린 구멍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직감적으로 위협을 느낀 마수가 커다란 가지를 꺼내 뮬로스에게 쇄도했다. 뮬로스는 피하지 않고, 온몸에서 마력을 끌어모아 마수의 몸통 안쪽에서부터 폭발시켰다.
퍼엉―!
커다란 소리와 함께 마수가 산산조각났다. 마수의 찢어진 검은색 잔해들이 공중에서 흩날렸다. 핵이 파괴된 마수는 더 이상 수복되지 않았다. 뮬로스는 이를 악물고 옆구리에 박힌 마수의 가지를 뽑아냈다.
"로시! 괜찮아?!"
뮬로스는 뽑아낸 가지를 내던지며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가에 울 듯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던 마코폭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돌아가자. 이 구역의 마수들은 다 처리했다고 보고해 줘. 난 다른 데 먼저 가볼게."
히사키는 뮬로스가 곧장 치료실로 향하리라 생각하며 끄덕였다. 히사키는 비행이 힘들어 땅에 발을 디딘 채로 포탈을 열었다.
히사키와 로시는 잘하고 있을까? 위험하지 않은 곳이랬으니 별일 없을 거야.
마코폭은 전투에 나간 둘을 떠올리며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보랏빛의 하늘에는 조그마한 별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슬슬 기온이 내려가기 시작해 방으로 돌아가려 할 무렵, 마코폭의 귀에 무언가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로시?!"
소리가 난 곳에는 크게 다친 뮬로스가 있었다. 뮬로스는 비틀거리며 한쪽 무릎을 세우더니, 땅을 짚고 일어섰다. 그러고는 성치 않은 몸으로 마코폭을 향해 다가왔다.
"로시!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아니, 빨리 치료부터 하자."
마코폭의 눈에 뮬로스의 상태는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심각했다. 실제로 상처투성이인 뮬로스는, 밭은 기침을 내뱉으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아. 그것보다 마법…… 하자. 수업을…."
"무슨 소리야, 로시. 이대로 어떻게 해. 빨리 치료소에 가서, 응? 치료받고…."
마코폭의 만류에도 완강한 뮬로스의 태도에 마코폭은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아무래도 뮬로스는 심각하게 다쳐서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한 것 같았다. 마코폭은 조심히 뮬로스를 앉히고 그대로 뛰어가 다른 마녀를 불러오려 했다.
"…마코."
그러나 가느다란 목소리에 멈칫하여 뮬로스를 돌아보았다. 뮬로스가 애타는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코폭은 결국 갈등하고, 얼굴을 일그러트리다가 뮬로스에게로 돌아왔다. 어깨를 한쪽 팔로 감싸며 자신에게 상체를 기대게 했다. 어느새 뮬로스의 옷자락은 마코폭이 흘린 눈물방울로 젖어가고 있었다. 뮬로스는 그런 마코폭을 보며 어지러운 머리로 생각했다. 사과해야지. 그때 마코폭에게 심하게 말해서 상처를 줬으니까, 꼭…….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뮬로스가 입을 떼려는 순간, 먼저 말한 것은 마코폭이었다.
"로시."
언제나처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는 다정하고 애틋했다.
"나, 그때 로시가 한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아. 네 말에 낙심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다른 마녀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는 변함이 없어. 물론 아직 내게는 친구들을 지킬 힘이 없겠지. 그게 분하고, 무능한 스스로가 원망스럽기도 해…. 그렇지만, 계속 시도할래.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볼래."
의식은 혼탁한데 어째서인지 마코폭의 목소리는 지독히 선명했다.
"내게 마법을 가르쳐주어서 고마워. 그때 한 말은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나는 계속 로시의……."
친구니까.
마지막 말과 동시에, 뮬로스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마코폭의 손을 단단히 붙들었다. 그리고 꺼지기 직전 가장 밝게 타오르는 횃불처럼, 자신에게 남아 있는 모든 마력을 뮬로스에게 쏟아부었다. 사위가 일렁이고 빛이 요동쳤다. 우우웅, 주변의 공기가 진동했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마코폭의 얼굴이 보였다. 뮬로스는 안심하며 미소지었다.
"……나야말로, 고마워."
거세게 일던 빛무리가 곧 사그라들고, 뮬로스는 힘없이 풀썩 쓰러졌다.
소녀는 꿈을 꾸었다. 검은 기류가 자신을 집어삼키려 들었다.
소녀는 꿈을 꾸었다. 불길한 어둠이 저를 향해 다가왔다.
소녀는 꿈을 꾸었다. 새까만 기운이 주변을 잠식하고…….
"―허억!"
꿈이 아니었다. 마코폭의 눈에 번져가는 어둠이 아른거렸다. 쿵. 쿵. 왼쪽 가슴이 크게 울렸다. 심장을 중심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 구석구석 흐르는 마력의 순환이 느껴졌다. 청량하고 따뜻한 마력이 신체 말단까지 전달되는 감각. 구름 위를 부유하는 듯한 안정감. 그리고 그와 대비되게 불길하고 음습한 기운.
……마코폭은 그제야 깨달았다. 제 꿈에 나타나던 검은 그림자는 악몽이 아니라 과거 자신을 죽였었던 마녀 블랙홀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은… 블랙홀과의 전투에서 사망한, 이전 여왕이었다.
이곳은 어디일까. 아까까지만 해도 로시의 곁에 있었는데. 베이지색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뮬로스에게 마력을 건네받고 몸속에 흘러들어온 마력에 감응이라도 하듯, 제 안에 있었으나 꺼내지 못하고 의식조차 하지 못했던 엄청난 양의 마력이 안에서부터 솟구쳤다. 마코폭의 주위로 하늘빛 아지랑이가 일렁거렸다. 맥박이 뛰었다. 완전히 회복된, 아니 이전보다 더 강하게 발산하는 마력에 마코폭은 익숙한 안정감을 느꼈다.
주의를 주변으로 돌리니, 역시 낯설지 않은 기시감이 느껴졌다. 과거 자신이 죽었던 중심 지역. 껍질의 가장 안쪽. 마코폭을 죽였던 마녀 블랙홀은 아직도 사그라들지 않은 채 흉흉한 존재감을 떨치고 있었다.
마코폭은 본능적으로 지금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한 번 실패했던 일. 실패로 모자라 목숨까지 바쳐야 했던 일. 그러나 어째서인지 두렵지 않았다.
다른 마녀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능력, 누구라도 통과할 수 있는 마법능력시험에서 낙방하여 기록상 유아기에 머물러 있는 쓸모없는 마녀. 그런 자신에게 마법을 가르쳐주고 마지막까지 함께해준 뮬로스와 언제나 자신의 꿈을 응원하고 제 뜻을 펼쳐 나아가기로 한 히사키가 떠올랐다. 빛조차 집어삼키는 블랙홀을 앞에 두고도, 마코폭은 떨지 않았다. 오히려 결연하기까지 한 미소가 떠올랐다.
"로시, 그리고 히사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이 무색하게 마력을 운용하는 흐름은 자연스러웠다. 마치 한몸처럼, 숨쉬는 것처럼. 겁나지 않았다. 뮬로스가 죽기 직전 건네준 마력과, 그에 화답한 막대한 양의 잠재되어 있던 마력. 그리고 굳건한 믿음.
이번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코폭은 자신을 향해 서서히 다가오는 블랙홀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돌아갈게."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허공을 밟아 도약했다. 긴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휘날리며 공중을 수놓았다.
"고마워."
따사로운 햇살이 눈가를 자극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의식이 순식간에 끌어올려졌다.
깜빡.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익숙하지 않은 천장이었다. 그리고 그대로 눈동자만 굴려 시선을 돌리자,
"……마코?"
의식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함께 있었음에도 그리운 베이지색의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다. 무언가를 달그락거리던 마코폭은 저를 부르는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리자 손에 쥔 다기를 내려놓고 황급히 뮬로스를 향해 뛰듯이 달려왔다. 별로 멀지 않은 거리임에도 서두르는 발걸음에 어쩐지 미소가 지어졌다.
"로시! 정신이 들어? 몸은 좀 어때, 괜찮아? 아프지 않아?"
쏟아지는 질문에 뮬로스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제가 가진 모든 마력을 마코폭에 건네주고 그대로 쓰러졌던 것 같은데, 지금은 몸이 조금 뻐근한 것 외엔 아픈 구석이 없었다. 뮬로스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잔뜩 받아 빛나는 제 친구를 바라보며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아. 아프지 않아. …그보다 어떻게 된 거야?"
분명 나는…… 죽었을 텐데.
"마코가 로시를 치료했어."
이어서 들려온 것은 마코폭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히사키가 품에 과일이 잔뜩 담긴 바구니를 든 채로 병실로 걸어들어와, 아담한 탁자에 바구니를 내려놓고 기쁜 미소를 지었다.
"로시가 잠든 동안, 믿지 못할 만큼 엄청난 일이 있었는데… 요약하자면 마코가 대단한 일을 해냈지."
제 칭찬에 쑥쓰러운 듯 마코폭이 어색한 미소만 띠고 있자, 뮬로스는 히사키에게 설명을 요하는 눈길을 던졌다. 히사키는 이걸 어떻게 정리해야 하나 고민하면서도 천천히 그동안 벌어진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마코가 마녀 블랙홀과의 전투에서 죽었던 예전 여왕님이었고… 블랙홀을 평범한 마녀로 되돌린 다음에, 죽어가던 나를 살렸다고?"
"응, 그렇지."
히사키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견한 듯 마코폭의 등을 팡팡 쳤다. 마코폭은 여전히 쑥쓰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내일이면 공식적으로 여왕님 칭호를 받을 거야. 로시가 그 전에 깨어나서 다행이네."
"……."
한낮이라 그런지, 제 옆에 선 두 친구가 유난히 선명하게 보였다. 뮬로스는 오후의 햇빛에 반짝거리는 베이지색과 노란색의 머리카락을 눈에 담으며 조용히 미소지었다.
마코폭과 만나고, 히사키를 지원하고……. 그동안 있었던 일이 꿈결처럼 아스라하게 느껴진다. 동시에 잊을 수 없도록 소중한 곳에 담긴 추억 같기도 하다.
"고마워, 로시. 무사히 깨어나 줘서."
그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마코폭이 다정하게 뮬로스를 바라보았다.
……고맙기는 누가 할 말을….
뮬로스는 문득 울컥하여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마코폭과 히사키가 당황했지만, 뮬로스가 무리 없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이내 걱정을 거두었다.
"마코가 여왕님 칭호를 받는 걸 구경하려면, 일단 뭐라도 먹고 기운 차려야겠지."
뮬로스가 그리 말하자 마코폭과 히사키가 웃음을 터트렸다. 햇빛에 오랫동안 닿은 곳이 따스해지듯, 뮬로스는 제 가슴이 어딘지 따뜻해져가는 것을 느꼈다.
실로 평화로운 오후였다.
뮬로스는 그들을 따라 웃으며 다같이 바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